
저녁 시간을 조금 지나 퇴근을 할 때, 하루 일과를 다 끝내고 혼자 집으로 돌아갈 때, 여지없이 술이 당긴다. 포장마차의 소주 한 잔, 샤워 후 마시는 맥주 한 캔 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칵테일 바를 떠올린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섬세한 술 한 잔, 일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분위기, 화려한 공간에서 느끼는 적당한 고립감이 좋기 때문이다. 물론 내일 아침을 위해서는, 내 건강을 위해서는, 이달의 자금 사정을 위해서는 곧장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 여러모로 옳지만 때로는 현실보다 현실을 유지하기 위한 작은 이탈이 소중할 때가 있는 법이다.

칵테일 바의 수많은 미덕 중 제일은 현실로부터의 일탈이다. 특히 호텔의 바는 일탈 판타지를 한층 더 충족시켜준다. 작은 규모로 장인 정신을 발휘하는 크래프트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큰 자본과 체계적인 팀이 뒤를 받쳐주는 게 분명한 디테일까지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최근 몇 년 간 호텔 업계는 식음 업장 중에서도 특히 칵테일 바나 라운지 바에 투자를 했다. 리뉴얼을 거친 호텔은 어김없이 칵테일 바를 전면에 배치했고, 새로 생긴 호텔의 꼭대기에는 여지없이 루프톱 바가 등장했다. 희귀한 위스키 보틀 위주였던 과거의 호텔 바는 최근 들어 젊고 경쾌한 칵테일 바로 바뀌었고 손님 역시 나이 지긋한 비즈니스 투숙객에서 젊은 바 호핑Bar Hopping 족으로 자연스럽게 교체됐다.
칵테일 바의 수많은 미덕 중의 하나야 말로 현실로부터의 일탈이다.
특히 호텔의 칵테일 바는 그 일탈 판타지를 한층 더 충족시켜준다.










호텔 바와 시내 바의 이용 가격은 이제 거의 비슷해졌다. 특별 프로모션 기간에는 오히려 호텔 바가 더 저렴하다고 느낄 때도 있을 정도다. 낮아진 호텔 바의 문턱을 넘는 일은 이제 손님들의 용기에 달렸다. 가격이 궁금할 땐 주저 없이 물어보고, 추천을 받을 땐 가격 상한선을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보통 규모가 큰 바가 많고 손님이 늘 북적이는 편이라 바텐더와 길고 깊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칵테일을 고를 때만큼은 바텐더에게 꼭 추천을 부탁해본다. 호텔 바마다 다른 특색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며 바와 내가 친해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호텔 바가 좀 부담스럽게 여겨진다면, 최근 부쩍 많아진 호텔 루프톱 바부터 시작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목 좋은 시내에 자리 잡은 호텔들이 많아지면서 손만 뻗으면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잡힐 듯한 드라마틱한 전망을 자랑하는 호텔 루프톱 바가 많아졌다. 실내 호텔 바보다 분위기는 한층 더 캐주얼하면서 칵테일 마시는 즐거움은 두 뼘 세 뼘 더 커진 공간이다.

지금 이맘때의 루프톱 바는 환상이다. 해가 지면서 오후보다 바람이 더 비스듬히 불기 시작하면 술을 마시기 딱 좋은 시간이라는 신호다. 한 여름의 루프톱 바는 칵테일이 너무 빨리 녹지만 가을의 루프톱 바는 칵테일에 제한 없이 마음껏 계절을 즐길 수 있어 왠지 더 좋다. 지하에서, 혹은 집에서라면 좀 부대끼던 술들도 일렁이는 풍경과 함께 마시면 확실히 더 맛있어진다.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에서 만드는 소독약 뉘앙스의 피티Peaty한 위스키는 야외에서 마실 때 그 진가가 더 발휘되고, 오크통에서 바로 꺼내 55도를 상회하는 강한 알코올 도수 그대로 병입한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도 바람을 맞으며 마시면 온몸에 착착 휘감긴다. 각각 진과 위스키를 베이스로 하는 쌉쌀한 칵테일 ‘네그로니’와 ‘불바디에’도 가을바람이 달콤한 안주가 될 수 있는 술이다. 탄산이 들어가는 가벼운 칵테일도 야외에서 상큼하게 즐기기 좋다. 한층 더 가깝고 편해진 호텔 루프톱 바로 어느 날 밤 성큼 찾아가 보자. 일상이 순식간에 여행으로 바뀌는 진귀한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